삼성전자가 인텔과 손을 잡으려 한다는 소식은 단순한 기업 간의 거래를 넘어선,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의 신호탄으로 읽힙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다시 미국을 이끌며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과거와 전혀 다른 규칙 아래 재편되고 있습니다. 삼성 입장에서 인텔과의 동맹은 기술·정치·경제가 얽힌 복잡한 생존 전략이자, 동시에 미국 시장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보험’과도 같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삼성과 인텔이 왜 손을 잡으려 하는지, 협력의 구체적인 영역은 어디인지,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기회와 위험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1. 트럼프 시대의 새로운 반도체 질서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초기부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반도체를 국가 안보의 핵심 산업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결과 인텔은 사실상 국가 반도체 챔피언으로 격상되었고, 미국 정부가 직접 10%의 지분을 확보하며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되었습니다.
반면 삼성은 상황이 복잡합니다. 텍사스에 초대형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며 미국 내 고용과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외국 기업입니다. 만약 트럼프 정부가 외국 반도체 기업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면, 삼성의 텍사스 공장과 글로벌 공급망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성은 미국 내에서 정치적 보호막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답이 바로 인텔과의 전략적 동맹입니다. 인텔은 미국 정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삼성은 인텔과의 협력을 통해 ‘미국 편에 선 기업’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2. 협력의 핵심: 유리 기판(Glass Substrate) 기술
삼성과 인텔의 협력 분야는 다소 특이합니다. 바로 유리 기판(Glass Substrate) 기술입니다.
- 인텔은 수년간 유리 기판 기술을 연구하다가, 최근 사업성을 이유로 공식적으로 철수했습니다.
- 그러나 연구 인력 상당수가 삼성전기 미국 지사로 이동하면서, 기술의 연속성과 노하우가 그대로 삼성으로 넘어왔습니다.
- 현재 협상안에 따르면 인텔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라이선스 형태로 제공, 삼성은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양산을 담당할 수 있다는 구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리 기판은 기존의 유기 기판(Organic Substrate)보다 훨씬 얇고 안정적입니다. 덕분에 더 높은 집적도와 성능을 구현할 수 있어, 차세대 고성능 서버 CPU, AI 전용 가속기, HBM 메모리 패키징 등에 핵심적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즉, 삼성은 인텔이 포기한 영역을 인수하면서 패키징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인텔은 버려둔 기술을 수익화할 수 있게 됩니다.
3. 18A vs 2나노, 기술적 갈림길
그러나 협력의 범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인텔은 자사의 미래를 18A 공정(1.8나노급) 성공에 걸고 있습니다. 반면 삼성은 이미 2 나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을 2025년 하반기부터 텍사스 테일러 공장에서 양산할 계획을 확정했습니다.
- 인텔의 18A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며, 성공 여부는 내부 제품(Panther Lake CPU) 성과에 달려 있습니다.
- 삼성의 2나노 GAA는 이미 다수의 고객 확보와 함께 대규모 투자가 진행 중입니다.
- 따라서 삼성 입장에서는 인텔의 미완성 기술에 굳이 의존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양사의 협력은 공정 기술 차원이 아니라, 패키징 및 보조 기술 협력 수준에서 머무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4. 경쟁과 협력, 묘한 공존
이번 동맹은 단순한 기술 거래를 넘어선 정치적·경제적 교환입니다.
- 삼성의 이익
-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리스크 완화
- 인텔과의 협력을 통한 정치적 보호막 확보
- 유리 기판 등 차세대 패키징 기술 선점
- 인텔의 이익
- 버려둔 유리 기판 기술을 수익화
- 삼성의 대규모 생산 역량을 활용
-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
하지만 동시에 이 동맹은 잠재적 경쟁의 성격도 지닙니다. 인텔이 파운드리 고객을 확보하려는 순간, 삼성의 파운드리와 직접 경쟁해야 합니다. 반대로 삼성의 텍사스 2나노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인텔의 미국 내 입지는 더 좁아질 수 있습니다.
5. 글로벌 파운드리 경쟁 구도 속 삼성·인텔
삼성-인텔 동맹은 단순히 양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TSMC와 SK하이닉스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습니다.
- TSMC는 여전히 2나노 공정에서 기술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으며, 애플·엔비디아 같은 대형 고객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 SK하이닉스는 HBM3E, HBM4 개발에서 앞서가며 AI 메모리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삼성은 인텔과 손을 잡아 미국 정부의 신뢰를 얻고, 동시에 기술 경쟁력을 강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6. 결론: 생존을 위한 ‘보험 동맹’
삼성과 인텔의 협력은 아직 불확실성이 크지만,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이 동맹은 정치적 필요성과 생존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삼성은 인텔과 협력하며 미국 내에서 확실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인텔은 삼성의 생산 능력을 활용해 자신이 포기한 기술을 부활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이 관계는 경쟁 구도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동맹은 누가 먼저 성과를 내느냐, 그리고 트럼프 정부가 앞으로 어떤 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향방이 결정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