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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및 배우 이야기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 (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

by mishika 2025.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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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결말 스포일러 없음)

1928년에 공개된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은 덴마크의 명감독 카를 테오도어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가 연출한 무성영화 걸작으로, 중세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인 잔 다르크(Jeanne d’Arc)가 종교재판을 거치는 마지막 순간들을 극도로 밀착된 방식으로 조명합니다. 백년전쟁 말기,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고 오를레앙 전투 등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는, 결국 이단 혐의로 체포되어 교회 법정에 서게 됩니다. 영국 세력과 종교 지도자들이 잔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며 심문하는 내용이 영화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데, 영화는 제한적인 공간(재판정과 감옥)을 배경으로 잔 다르크의 얼굴 클로즈업과 압박 가득한 신문 과정을 이어갑니다.

대규모 전쟁 장면이나 영웅적 활약을 스펙터클로 표현하기보다,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가 겪는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미세한 표정과 시선으로 전달합니다. 잔이 자신이 받은 신의 음성을 절대 의심하지 않으려 하지만, 재판관들이 집요하게 몰아붙이며 외면적·내면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모습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죠. 당시 시대상과 달리 이 작품은 후대의 사운드 없이 무성으로 진행되며, 흑백 필름에 담긴 묵직한 침묵과 배우들의 표정 연기가 뒤섞여 압도적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결말 즈음, 잔 다르크가 어떤 식으로 재판의 결과를 맞이하는지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만, 감정적·시각적 체험은 단순한 역사 재현 이상의 숭고한 비극을 관객에게 선사합니다.

2. 등장인물 

잔 다르크(마리아 팔코네티)
프랑스 국민적 성녀이자 전사적 면모를 보이는 실존 인물. 영화는 오직 그녀가 재판과 심문을 받는 장면을 중심으로 초점을 맞추는데, 잔이 느끼는 두려움과 신앙심, 그리고 초인적 결의를 다이내믹하게 포착합니다. 팔코네티의 연기는 영혼이 고스란히 표정에 실린 듯 섬세하며, 무성영화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 중 하나로 꼽힙니다.

재판관들과 성직자들(주교, 수도사, 법학자 등)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몰아 처벌하려는 종교재판관들로, 성직자와 법률가가 섞여 심리를 진행합니다. 이들은 잔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녀의 신앙고백을 뒤집어놓으려 교묘한 언어와 날카로운 질문을 반복하며, 잔을 신앙 배신자로 만드는 데 집중합니다. 표정과 몸짓이 날 선 위협으로 가득하며, 잔과의 대립을 한층 팽팽하게 만듭니다.

잔 다르크를 곁에서 보조하는 수사들
잔에게 동정심을 느끼지만, 공개적으로 그녀를 옹호하기는 어려워 갈등을 내면화한 인물들. 재판 진행 중 잠시 인간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절대다수 관료들의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정적 도움을 주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군중과 병사들
사건 말미에 군중이 몰리며, 잔 다르크의 운명을 지켜보게 됩니다. 병사들은 재판정 밖이나 감옥에서 잔을 감시·통제하는 역할을 하며, 마을 사람들은 “영웅인지, 이단인지”라는 종교적·정치적 갈등 가운데 어수선한 분위기로 등장합니다.

3. 총평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는 1920년대 말 무성영화 예술의 정점이라 평가되며, 인물 표정 클로즈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학적 연출이 압도적입니다. 이를 연출한 카를 테오도어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의 재판 기록을 충실히 참고해 사실성과 극적 긴장 두 가지를 모두 잡으려 노력했습니다. 특히 마리아 팔코네티의 몰입도 높은 연기는, 관객에게 극한 상황에 놓인 잔 다르크의 고뇌와 신앙심을 무성영화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체감하게 만듭니다.

일체의 군중 전투 장면이나 웅장한 배경 대신, 단조로운 무대에 비틀린 구도와 극단적 조명이 더해져 종교 재판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잔 다르크가 가진 신앙과 정체성이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얼마나 절박한 무게인지, 관객은 조금씩 파고드는 심문과 잔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무성영화이지만, 역설적으로 말없이 소리가 없는 장면이 훨씬 더 큰 긴장과 서사를 전달하는 셈입니다.

잊혀질 뻔했던 오리지널 필름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복원되면서, 현재 우리가 감상하는 판본은 무성영화사의 진귀한 보석으로 거론됩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영화 예술인과 비평가들이 “가장 위대한 무성영화 중 하나”로 손꼽을 정도로, 이 영화는 종교극이자 법정극, 인물 심리에 대한 실험영화, 그리고 여성 주체로서의 고통과 헌신을 표면화하는 드라마로 다층적 의미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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